[긴급]인쇄술의 역사, 유래, 문명, 발전, 동양의 인쇄술, 발명, 역사, 서양의 인쇄술, 동서양의 인쇄술의 이해, 특징, 현황, 사례, 관리, 역할, 기법, 시사점, 조사분석인문사회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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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동양의 인쇄술 발명과 역사
Ⅲ. 서양의 인쇄술 발명과 역사
Ⅳ. 동·서양의 인쇄술의 이해
Ⅴ. 마치는 말

Ⅰ. 들어가는 말

인쇄는 인쇄판의 판 면에 먹 또는 잉크를 묻혀 그 판 면의 문자·기호·그림 등을 종이·비단 등에 누르거나 문질러 찍어내는 일, 또는 그 기술을 말한다. 인쇄판은 옛적의 목판·활자판을 비롯하여 근대의 평판·볼록판·오목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우리 나라의 초기 인쇄는 목판인쇄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기는 경주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목판권자본이 751년 (경덕왕 10) 무렵에 간행된 점으로 미루어 그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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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동양의 인쇄술 발명과 역사

Ⅲ. 서양의 인쇄술 발명과 역사

Ⅳ. 동·서양의 인쇄술의 이해

Ⅴ. 마치는 말

Ⅰ. 들어가는 말

최초로 성공시킨 것이 바로 고려의 주자인쇄이 다. 13세기 전기에 주자로《상정예문 詳定禮文》을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중 주자본을 다시 새겨낸《남명천화상송증도가 南明泉和頌證道歌》가 전하여지고 있다. 고려의 주자인쇄는 조선조로 계승되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활자의 재료면에서 볼 때 동·연·철·나무·찰흙 등과 같이 그 종류가 다양하며, 글자체의 면에서 볼 때는 더욱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론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인쇄술을 주로 다루어 설명하였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나라 인쇄의 기원과 신라시대의 인쇄술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인쇄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를 구성하는 가장 위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제일 큰 요소이다. 인쇄술은 과거 500년 동안 사상을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서 인간의 여러 활동 분야에 침투해서 관계를 갖게 됐다. 정치, 법률, 종교, 경제, 교육, 사회, 사상, 철학, 문학, 예술, 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인쇄술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충분한 활동을 하여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인가. 인쇄술은 산업 그 자체로써도 다른 산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여 왓다. 그 기술적 과정에서 서로 관련되는 산업의 진보를 크데 돕는다.?1)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 책은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매우 걸리는 작업이었으며, 이를 복제하는 것은 매우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다. 중국에서 시작된 인쇄술의 탄생은 이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문화사에 있어 새로운 도약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나침반, 제지술, 화약과 함께 중국의 고대 4대발명품에 들어가는 인쇄술과 독일의 구텐베르크에 의해 시작된 실용화된 인쇄술의 발전은 시기적인 차이가 존재하지만 동·서양에 지적 발전을 일으킨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유럽의 경우 실용화된 인쇄술로 인해 유럽 각지에 인쇄소가 생기고, 많은 양의 서적들이 출판됨에 따라 유럽사회 전반에 있어 지식을 광범위하게 보급하게 되었다. 기존에 구두사회였던 유럽의 사회적 전통이 인쇄술로 인해 무너진 것이다. 이와 함께 책의 보급은 르네상스라는 황금기를 유럽 전역으로 효과적으로 확산시킴으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하는 토대로서 작용하였다.
앞서 말한대로 동양에서는 유럽보다 앞선 시기에 인쇄술의 발전이 있었다. 중국에서 시작된 인쇄술의 발명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절`이 나온 한국 은 유럽보다 몇백년 앞선 시기에 인쇄술이 발명되고, 활용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인쇄술과 달리 그 사회·문화적 파급력에 대한 부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양과 다른 시기와 문화적 상황이 존재하나 인쇄술이 가지고 있는 기술혁명의 파괴력을 생각해 볼 때, 이에 대한 설명이나 역사적 고찰이 적다는 것은 매우 의아한 점이다. 한국에서도 `직지심체요절`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세계 최초,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것만 강조할 뿐 이에 대한 문화적 영향이나 사회적 파급 효과에 대한 부분들은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이 글은 그렇다면 동양에서는 유럽과 달리 인쇄술의 파괴력이 없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왜 동양에서는 인쇄술의 영향이 잘 드러나지 않는가?, 동양에서는 서양과 달리 어떻게 나타났을까? 등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한다.
동·서양은 역사·문화적인 맥락이 다르며, 다른 시기에 인쇄술이 나타났기 때문에 직적접인 비교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이 왜 나타났는지에 대한 요인들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비교점이라고 생각된다. 서로 다른 역사·문화적인 맥락을 고려함으로서 인쇄술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고찰하고, 그 파급효과를 살펴봄으로서 세계사적으로 인쇄술이 문화, 문명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Ⅱ. 동양의 인쇄술 발명과 역사

1. 초기 인쇄술
기술의 발전은 단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선행되어 이루어진 기술들이 종합적으로 연계되고, 발전하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인데, 인쇄술 역시 선행된 기술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인쇄를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종이와 잉크의 발명이 있었기 때문에 인쇄술이 발명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종이를 만드는 제지술은 105년, 중국 후한시대에 채륜이 종이의 초조법을 개량 발명하였다.2) 이와 함께 400년경 중국 동진에서 연기 그을음을 아교로 굳혀서 제작한 판묵(먹)은 인쇄를 하는데 필요한 잉크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재료들을 이용한 원시적인 인쇄는 인장의 날인이나 석비의 탁본으로 볼 수 있다.3)
중국에서는 불교 유물에서 이러한 형태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들어왔던 통로인 돈황지역에서 주로 발견된 초기 불교 유물들을 보면 인장과 인장의 날인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이후에 중국에서 발명된 목판인쇄술과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선행되었던 기술의 발전과 문화적인 필요성이 겹치면서 인쇄술은 중국 당나라 시대에 들어 나타났다. 당나라 시대는 문학, 예술, 종교가 다양하고, 융성했던 시기이다. 특히 현재의 중국과 다르게 서쪽이 중심지였던 시대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융합되면서 당대의 독특한 사회를 이루었다. 문화적인 풍부함은 당시 서적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
이 당시 문인들은 시를 쓰고, 글을 지은 것들을 예술로 생각했으며, 이를 하나로 묶어 책으로 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종이의 수요가 급증하고 범위가 넓어지는 등 필사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목판인쇄술이다.
한국은 인쇄술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중국과의 교류가 점차 빈번해지면서 각종 서사 재료에 기록하는 방식과 서책들이 전해져 오고, 점차 발전하면서 인쇄술이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다르게 한국 자체 내에서 인쇄술이 발전할 수 있었던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고, 현재 남아있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 나온 점으로 보아 한국에서 인쇄술이 처음 발명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에서 제지술이나 인쇄술이 중국에 거의 뒤쳐짐 없이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610년에 고구려에서 담징이 일본으로 종이와 먹 등을 전했다는 것도 기록에 남아 있으며, 751년에 제작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당나라에서 수입된 종이가 아닌 신라 자체에서 생산해냈다는 점 등은 당시의 기술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뜻한다.
인쇄술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은 불교를 받아드리면서 인쇄의 필요성과 수요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인쇄술이 생겨나기 전에 널리 보급되었던 기록 방식으로는 손으로 일일이 베껴 쓴 필사 방식을 꼽을 수 있는데, 불교에서는 불교 경전을 베껴쓰는 사경이 매우 중요했다. 불교에서 사경은 공덕을 쌓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불경을 쓰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공양하면 모두가 부처와 다름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고, 부처의 보호로 모든 재앙을 물리치고 소원 성취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경 공덕은 정성껏 했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다. 이는 후에 인쇄술로 발전될 수 있는 수요적 요건이 되었다고 본다.

2. 목판인쇄술의 발전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에서 시작된 인쇄술의 기술을 받아드려 이른 시기에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들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초기 목판인쇄술은 불교서적에 대한 인쇄가 매우 활발했다. 이는 국가적으로 불교국가를 이상으로 하는 국가정책과 부합됨과 동시에 당시 동아시아에 있어 불교는 자국의 문화적인 수준을 좌우하는 위치였던 만큼 중요하고, 국제적인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는 요소였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형성되던 인쇄문화가 고려로 접어들어 사찰에 의해 계승되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인쇄의 발상 보급에 큰 영향을 끼친 불교가 고려 시대에 들어 국가적 종교로서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면서, 종파가 확장되고, 많은 수의 사찰이 늘어났다. 사찰에서는 불경간행이 진행되어 이 시기 많은 수의 서적들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 잇따른 외적의 침입과 내란을 겪으면서 많은 유산들이 사라져 남아있는 것은 많지 않다.
탑 안에 간직하던 간본들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을 뿐이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이 1007년에 간행된 보협인다라니경이다. 이 경은 고려초기의 대표적인 정각본으로 한국의 독자적인 판본으로 볼 수 있다. 중국으로부터 경문을 도입하고 그것을 새겨 탑에 안치하는 불사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실제의 판각과정에서는 그것보다 월등하게 창의성을 발휘하여 독자적인 방법으로서 정서, 정각하였던 것이다
고려는 1xxx년(현종2년)에 거란이 침입하자 불력으로 국란을 타개하고자 대장경판각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조대장경이며, 1087년(선종4)에 이르러 일단락을 되었다. 이후 고려는 계속하여 속장경, 재조대장경 등을 판각하였다. 재조대장경은 몽고군의 침입으로 부인사에 소장되었던 초조대장경이 1232년(고종19년)에 소실되자, 다시 이를 새겨서 불력의 수호로 몽고의 외침을 물리치고자 2차로 판각한 것이다.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완성시켰으며, 그 경판수는 무려 80,100여 판에 달한다. 이것이 바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다.
중국에서는 당 말기에 들어서면서 목판인쇄술을 통해 다양한 영역에서 서적들이 출판되었다. 이 시기에 특징으로는 풍도에 의해 시작된 구경 간행사업이다. 중국사상의 한 획을 긋는 유교의 지위를 다시 확인 할 수 있는 중국문화사적으로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와 함께 국가가 주도하는 공식적으로 인쇄가 시작한 관학인쇄시대를 여는 중요한 지점으로, 국가가 주도적으로 통제를 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구경에 관한 모든 인쇄는 정부에서 시행하고, 공인된 경전만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소규모적인 비공식적인 인쇄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특히 불교서적의 인쇄는 지속적으로 나타났다.4)
송나라 시기에 들어 중국은 목판인쇄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는 중국 문화사에 있어 가장 황금기로 예술, 종교, 철학, 문학에 이르기까지 중국문화라는 사상적인 확립을 이룬 시기이다. 당대에 나타난 인쇄술은 송대에 들어 빠르게 발전 하였다.

3. 활자인쇄술의 발전
또 다른 기술인 활자인쇄술은 송나라 시기에 들어 발명되었다. 목판인쇄는 나무를 베어 일정기간을 물에 담가놓고 글자를 새기기 쉽게 결을 삭히고, 또 쪄서 즙액(汁液)을 빼어 썩지 않게 하고, 응달에서 충분히 건조시켜 뒤틀리거나 부서지지 않게 한 다음 대패질하여 깨끗이 쓴 판서본을 뒤집어 붙여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내는 것이므로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면서도 오직 한 문헌만 인쇄할 수 있다는 것에 국한된다는 점이 큰 단점이었다.
한 벌의 활자를 만들어 잘 보관하면서 수시로 손쉽게 찍어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활자인쇄이다. 활자인쇄의 최초의 시도는 북송의 비셍(畢昇)이 11세기 전기에 찰흙으로 초벌구이 해서 만든 교니활자(膠泥活字)를 만들었다. 모양이 납작하고 바둑알 같이 생겼을 것으로 짐작되는 최초의 활자이지만, 실용화에 실패해 널리 사용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를 기반으로 활자인쇄의 필요성 증가와 기술의 발전으로 10세기 말경 들어 동판을 통한 인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주자인쇄의 창안으로 간단하고 경제적인 활자인쇄가 실행되었다. 무인정부 시기 천도한 강화에서 주자로 상정예문(評定禮文)을 28부 찍어냈다. 이 책은 국가의 전례를 다룬 것으로 주자로 28부를 찍어 여러 관사에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주자인쇄는 원나라에 고려가 종속당하면서 그 기능이 점차 마비되었다가, 원말기 들어 배원사상이 싹트고 주권을 되찾으려는 의식이 대두되면서 다시 종전처럼 서적포를 설치하고 주자를 만들어 경사자집은 물론 의서?병서?율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적들을 고루 찍어내서 학문에 뜻을 둔 이들의 독서를 널리 권장하기 시작했다.
1392년에는 제도상으로 조직되어 서적원이 생기고 주자인쇄업무를 담당하는 직책까지 마련되었던 것이다. 지방에서는 흥덕사(興德寺)라는 사찰에서 주자를 만들어 불서를 찍었다. 사찰 재래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활자를 주조하여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가지런하지 않고, 행자수가 일정하지 않는 등 초기의 정립되지 않은 주자인쇄술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을 남겼으며, 주자인쇄의 맥을 이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인쇄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활자인쇄가 고도로 발달한 것이 그 특징이다. 조선조의 관판인쇄는 중앙관서가 중심이 되어 실시하여왔는데, 오랜기간에 걸쳐 소요되는 책은 목판으로 간행한 것도 있지만 주로 활자를 만들어 필요한 책을 수시로 찍어내어 문신을 비롯한 중앙 및 지방의 관서, 학교, 서원 등에 반사하고 그것이 더 필요한 경우는 다시 복각하여 널리 보급하게 하는 인쇄정책을 펼쳤다.
태종시기에는 행정기구를 개혁하여 독자적인 관제로 정비하기 시작하였고, 억불숭유책을 국시로 하는 이념적 또는 정신적 토대 구축함으로서 숭문정책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 정책의 촉진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유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하는 일이기 때문에 서적을 고루 간행하여 널리 보급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1403년(태종3년)에는 주자소를 설치하고 동활자의 주조를 명하였는데, 이때 수개월 걸려 완성된 활자가 계미자이다. 이 계미자는 그해의 간지를 따서 이름을 붙였으며, 밀랍에 잘 꽂힐 수 있도록 그 끝은 송곳모양으로 뾰족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수시로 밀랍을 녹여서 바로잡아야 하는 폐단이 있었다.
이 조판기술은 1420년(세종2년)에 만들어진 경자자에서 크게 계량되었는데, 활자의 조판용 동판을 평정하고 튼튼하게 만들어 서로 잘 맞도록 하여 인쇄 중 밀랍을 녹여 사용하지 않아도 활자가 움직이지 않아 인쇄의 능률이 계미자보다 훨씬 증가하였다. 이 경자자의 인본은 비교적 여러 종이 전래되고 있다. 세종은 1434년(세종16년)에 또다시 개주에 착수하여 큰 자와 작은 자의 동활자 20여만 개를 주성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갑인자이다. 이는 글자체가 매우 아름답고 명정한 필서체이다. 이 갑인자에 이르러 활자의 네모를 평평하고 바르게, 그리고 조판용 동판도 완전한 조립식으로 튼튼하고 정교하게 개조하였기 때문에 대나무만으로 빈틈을 매워 조판하여 인쇄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의 관주인쇄술은 세종조의 갑인자에 이르러 비로소 고도의 단계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갑인자는 선조조 초기에 재주할 때까지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어 전하여지고 있는 인본이 가장 많다. 이 활자는 정교하고 아름다워 조선 말기까지 보주 또는 개주되면서 주용되었다. 조선의 관주인쇄술이 절정에 이르렀던 세종조에 있어서 우리글을 창제하고 처음으로 한글활자를 부어 국역본을 찍어냈음도 우리나라의 인쇄문화사상 특기할만한 일이다. 1447년에 인출된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1488년에 인출된 동국정운의 한글이 모두 고딕체의 한글활자로 정교하게 찍혀져 있다.
조선 전기에서 고도로 발달하여온 활자 인쇄시설은 임진왜란을 겪는 사이에 완전히 파괴 또는 소실, 약탈되었다. 정조가 집정하면서부터 문예부흥정책에 치중하고 역대 선왕의 인쇄정책을 계승하는데 힘썼기 때문에 조선 후기 활자인쇄문화가 다시금 발전할 수 있었다.

Ⅲ. 서양의 인쇄술 발명과 역사

1. 동양에서의 전래
산업혁명을 통한 기술발전은 서양세계가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산업경제시스템과 강력한 총포로 무장한 서양에 동양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채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까지 서양 중심적인 세계관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서양이 세계사적으로 부각된 것은 불과 몇 백년 되지 않는다. 유럽에서 근대적인 움직임이 태동한 르네상스시대가 시작되면서부터 현재까지 짧은 시간동안 유럽은 큰 변혁을 겪었고, 그 변혁에는 몇 가지의 중요한 기술발전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구텐베르크에 의해 실용화된 인쇄술의 발전이다. 인쇄술의 발전은 유럽사회 전반에 있어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산업혁명의 기초가 된 르네상스시대를 태동하게 한 기반이었다.
유럽에서 기술의 발전은 우선적으로 동양과의 교류에서 시작되었다. 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통해 이어지는 교역로는 고대부터 두 문화권이 서로 교류하고 영향을 줄 수 있었던 통로로서 작용했다. 중국의 특산물인 비단이 운반되었다고 해서 실크로드라 읾이 붙여졌지만 유럽의 발전을 일으킨 종이기술이 전파된 길이기도 해 페이퍼로드라고도 불린다.5) 실크로드는 동·서양의 문화적 교류지이자 완충지였으며, 충돌지이기도 했다. 751년 당과 이슬람 제국 압바스왕조 간의 탈라스 전투에서 압바스왕조가 대승을 거둠으로서 얻었던 포로 중에 제지기술자가 존재했는데, 이를 통해 제지기술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이슬람국가들을 통해 지중해 연안쪽으로 전파되었으며, 이후 유럽 지역으로 서서히 확산되어 갔다. 13세기 들어 유럽에 종이가 전파됨으로서 유럽 세계는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2. 유럽의 인쇄술의 발전과 영향
유럽에서도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필사본 중심의 사회였다. 수도원을 통한 필사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민간에까지 널리 퍼져있지 않았으며, 대부분 소수의 지배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문자와 서적은 서민들과 구분지어지는 차별적인 문화였다. 책의 출간은 귀족이나 성직자의 독점 영역이었으며, 책 제작이라고 해야, 귀족의 경우에는 호화 장정본, 성직자의 경우에는 예배서나 신학서가 전부였다.
이후 르네상스의 태동이 나타려던 시기에 들어 새로운 분야 책들이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철학?논리학?수학?천문학 분야와 함께, 단테 같은 작가는 자국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점차 중산층이 문학과 책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새로운 수요층이 늘어나면서 필사로는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한계점은 구텐베르크가 대량인쇄가 가능한 활자인쇄술을 발명하면서 사라졌으며, 서민들에게까지 서적이 퍼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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